2024. 12. 10. 17:28ㆍ더욱/달콤한
#정대리 #대기업 #외제차 #회사원스타그램
대기업에 다니는 정 대리는 프로포즈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기왕 묵는 거 좋은 곳, 풀 오션뷰. 선물은 D브랜드 핸드백. 이리저리 더하니 프로포즈 비용만 800만 원이 들 것 같다. 여자친구는 사준생이란다. 사업 준비생. 이 커플이 같이 있으면 대화하는 시간보다 각자 핸드폰 보는 시간이 더 길다. 그래도 그게 편하다. 대학생부터 끌고 다닌 아반떼는 하차감이 별로다. 남들 보기 부끄럽다. 정 대리는 회사를 대표하는 욜로족이다. 여자친구도 그렇다. 결국 정 대리는 중고로 외제차를 뽑았다. 프로포즈 여행에서는 카드 한도초과가 떴지만 사진은 별개다. 수백, 수천장을 찍는다.
권 사원은 오늘도 출근
김 부장 팀의 막내 권 사원은 올해 3년차 사원이다. 취준생 시절을 거쳐 대기업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그런 권 사원이 회사에서 웃음을 잃는 데는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열심히 만든 프로젝트는 김 부장이 멋대로 바꾸고, 인사고과는 김 부장의 동기인 박 과장이 불쌍하다며 사원, 대리급은 아예 진급을 못할 정도로 고과를 낮추고 박 과장에게는 최고 고과를 준다. 회사에 전부를 바치지 말라던 선배들의 말이 떠오른다. 기껏 만난 남자친구는 만날 때마다 분식집만 간다. 겉도는 대화만 하다가 헤어진다. 출근 하고 송 과장에게 간단하게 상담을 해 본다. 남자친구와 부동산 얘기만 나오면 싸운다고. 경제 관념도 한 번 보라는 송 과장의 말에 권 사원은 이런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비트코인이 올라서 오늘 공차를 쏘겠다고 하는 정 대리. 권 사원은 명품으로 도배한 정 대리를 보며 가끔 김 부장의 향기가 난다고 생각한다.
담판을 짓겠다고 만난 남자친구는 관심도 없는 게임 얘기에다 수백만 원을 썼다고 하질 않나, 유튜버에게 후원금을 보내고, 직장생활하면서 용돈을 받고… 이 인간의 경제관념이 미심쩍어진다. 실체를 알고 나니 정이 떨어진다. 남자친구가 데려다준다는 것도 거절하고 생각에 빠진다. 상견례까지 했는데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인 건지, 그냥 결혼해야 하는 건지.
곧 죽어도 인서울
정 대리는 여자친구를 만나 미슐랭 원스타 식당에 간다. 사진도 잔뜩 찍었고, 오늘 여자친구도 만족한 것 같다. 여자친구가 만족하면 정 대리도 만족스럽다. 집에 오니 배가 고프다. 스튜디오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아 참는다. 오늘 찍은 사진 중 베스트 컷을 골라 인스타에 업로드하고 나니 허기가 사라진다. 정 대리는 집을 보기 위해 오후 반차를 냈다. 보증금 1억에 월세 50, 30만 원에 1억씩. 예산에 맞추니 점점 외곽으로 간다. 여자친구는 무조건 서울이어야 한단다.
인사고과 시즌이 되었다. 김 부장이 공장으로 발령나고 최 부장이 팀장으로 왔다. 최 부장은 김 부장과 정반대의 스타일이다. 게다가 권 사원이 준비하던 프로젝트도 다시 발표할 기회를 만들어준다. 권 사원은 그동안 쌓인 회사에 대한 원망이 녹아내린다.
부먹, 찍먹보다 중요한 게 있지
권 사원은 회사 얘기를 하면서 맛있는 거나 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남자친구를 만났다. 이름 있는 중식당으로 간다. 회사를 대충 다니라는 남자친구는 회사에서도 하루종일 게임을 했다면서 또 게임을 하고 있다. 심지어 20만 원짜리 아이템도 샀단다. 남자친구는 탕수육이 나오자 한손에는 핸드폰을, 다른 한손으로는 소스 그릇을 들더니 탕수육 위로 소스를 들이붓는다. 전에도 부어먹는 게 싫다고 했지만 이 사람은 내일 탕수육을 먹어도 또 부어먹을 것 같다. 점점 이 남자에 대한 확신이 어두워진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말해보지만 내 편이 아니라 남자친구 편인 것만 같다.
권 사원의 발표일, 면접 때보다 더 긴장했지만 발표도 잘 했고 칭찬도 듣는다. 며칠 뒤, 정 대리는 대출을 최대 한도로 받아서 전세집을 계약한다. 여자친구와 가전 얘기를 하다가 백화점을 가기로 한다. 순식간에 거의 3천만 원을 썼지만, 500만 원 할인받았으니 500만 원을 번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축제
권 사원은 날이 지날 수록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어진다. 남자친구와 속초로 여행을 간다. 이번 여행에서 남자친구와 결혼, 미래, 각자 스스로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계속되는 침묵을 깨고 권 사원이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대화가 극에 달하면서, 남자친구가 엄마가 술 담배 하는 여자는 절대 만나지 말라고 했다는 말에 결국 터져버린다. 이 남자는 진짜 아니라고. 바로 짐을 싸서 나온다. 어느새 어두워진 바닷가에서 폭죽을 날리며 근심도 함께 털어낸다.
달까지 달려가도 닿을 수 없다
정 대리는 집에 가득찬 새 가구와 가전이 만족스럽다. 월에 200만 원씩, 1년만 지나면 모두 그의 소유다. 그에 비해 20년된 집의 인테리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 커피머신만 클로즈업해서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이제는 와이프가 된 여자친구와 한강으로 나간다. 처음 마음가짐과는 다르게 자주 나오진 않았다. 걷다보니 꽤 많이 나와서, 전동 킥보드를 타기로 한다. 와이프와 함께 타다가 길거리에 넘어져 있던 킥보드에 걸려 크게 넘어진다. 그대로 병원 신세를 진 정 대리 부부. 정 대리는 3천만 원이라는 금액이 믿기지도 않고, 어디서 돈을 구해야 할지도 막막하다. 대기업에 8년 가까이 다니고도 3천만 원이 없다니, 자괴감도 든다. 자신의 아끼는 애마를 팔기로 한다. 송 과장이 면회를 왔다. 병원비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평소 씀씀이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그 이유가 된 과거 얘기도 절로 나온다.
정 대리는 중학교 때까지 울산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이 나자 온 가족이 이사를 왔고, 정 대리는 의도치 않게 강남 8학군에 배정이 되었다. 반에서 유일하게 타지에서 왔고 사투리를 썼지만, 무시하거나 텃새를 부리는 친구들은 없었다. 그런데도 달랐다.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듣고, 같이 점심을 먹고, 같은 운동장에서 뛰어놀았지만 친구들은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 대리와 다른, 더 높은 세상에 있었다. 달을 잡으러 아무리 달려가도 좁혀지지 않는 그런 거리 같은 것이 존재했다. 왠지 모를 자격지심에 카드를 거침없이 긁었다. 그게 수준에 맞을 것 같아서. 하지만 동생을 통해 들려오는 말은 달랐다. 허세 부린다고, 돈으로 처바른다고.
카드 정지는 처음이라
정 대리는 드디어 퇴원을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에 백화점에 간다. 봐둔 코트를 사고, 구경하다 구두도 산다. 집에 돌아오니 왠지 조용하게 느껴진다. 오늘 산 코트와 신발도 오래 전에 산 것만 같다. 예전처럼 여운이 오래 가지 않는다. 그래도 쇼핑할 때만큼은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며칠 뒤, 은행에서 온 편지를 받는다. 혹시나 VIP 고객으로 업그레이드를 해주나 했지만 신용카드 연체에 대한 경고장이었다. 5일 뒤에 모든 신용카드가 정지된다고 한다. 와이프 병문안 겸 와이프가 주문한 패딩을 가져간다. 와이프는 일도 안하면서 돈이 어디서 나는지 모르겠다. 카드 정지에 대해 얘기를 해보니 정 대리가 무슨 방도라도 있는 듯이 믿는 눈치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 답답하다.
파국
권 사원은 전세를 끼고 집을 샀다. 정 대리의 와이프는 퇴원을 했다. 입원 동안 알아봤다며 정 대리의 회사 근처에 카페를 연단다. 망할 줄 알았던 카페가 두 달이 지나도 성업 중이다. 와이프는 카페 매출을 알려주지 않는다. 정 대리도 장모님이 카드 정지로 자신을 다그친 후로 공개하기 싫어졌다. 가전제품 할부가 끝나자 정 대리는 200만 원의 여유가 생겼다. 차를 알아보려는데, 와이프가 차를 따로 사잔다. 얼마를 벌기에 그러나 싶어 매출을 물어봤다가 큰 싸움으로 번졌다. 와이프가 집을 나간다.
"정 대리, 어릴 때 부모님이 남들하고 비교하면 어땠어?" (중략) "남들과 비교당하는 거 싫어했으면서 왜 지금은 본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 - p.266
"인생은 한 번뿐이라고? (중략) 죽는 순간이 단 한 번뿐이지 우리 인생은 매일매일이야." - p.270
살다 보면 울고 싶을 때도 있지
프로젝트를 열심히 준비한 권 사원은 2등이라는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 거기에 인사고과까지, 최 부장이 최고인 S를 줬어도 지난 3년간 김 부장에게 받아온 C가 걸려 진급 누락이 되자 현실에 좌절한다. 집에 도착해서 홀린 듯이 대학원에 지원한다. 권 사원은 대학원에 합격했고, 퇴직 결심을 이사가 된 최 부장과 송 과장에게 전한다.
정 대리는 평소처럼 인스타그램을 뒤적인다. 친구 버버리맨의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그의 부고소식을 전해받는다. 충격을 받은 정 대리는 며칠 휴가를 내고 사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낯설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정 대리의 전세 기간이 끝났다. 시세가 올라 월세로 바꾸기로 한다. 권 사원이 샀다는 집을 알아보다 부동산에서 김 부장을 만난다. 김 부장은 변하지 않았다. 작아진 집만큼 물건을 정리한다. 와이프와는 별거 상태다. 와이프의 짐들을 전달하고자 연락을 했더니 없는 번호란다. 카페로 직접 찾아가보니 카페가 없어졌다. 통쾌하면서도 씁쓸하다. 선물이라도 사 들고 가서 화해할까 싶어 백화점에 방문한다. 코트를 살래도 이전 같은 쾌감이 없다. 딸기 케이크를 사서 지하철을 탄다. 주택 조합원을 모집한다는 문자에 통화 버튼을 누른다.
1권이 김 부장으로 대표되는 '꼰대'를 신랄하게 보여줬다면 이번 권은 욜로하다 골로 가는 정 대리와 결혼을 앞두고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는 권 사원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 권과 마찬가지인 점은 관점이 바뀔만한 사건을 겪고 정신을 (상대적으로)차리게 된다는 것이다. 정 대리와 다르게 성실한 성격의 권 사원은 마치 이후 권에서 그려낼 송 과장 얘기를 위한 토대쌓기 같다. 권 사원의 이야기를 하면서 보여주는 송 과장이 자꾸 메리수처럼 보인달까. 권 사원은 어떻게든 살아갈 것 같은데, 충격을 받고 이후 어떻게 살아갈지, 와이프와 어떻게 될 지 궁금해진 정 대리 얘기는 3권에서 계속이라며 그냥 끝나버린다. 아쉽다. 이번 권 또한 읽으면서 머릿속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또한 뭔가 큰 사건을 겪어야만 바뀌려나? 그런 건 시간이 지나봐야 알 일이겠지.
241126
송희구 | 2021.08.25. 초판 | 서삼독 | P.343
ISBN 979-11-65344-00-9 | ₩15,000
문학/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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